경주는 천년고도의 유서 깊은 고장이고 최부자의 시조 최치원은 이곳에서 태어나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우리나라의 대표적 학자다. 그들의 후예들은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가문을 계승하고 훗날 많은 부를 축척하게 되면서 영남지역을 벋어나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주위에서는 이들의 부를 단순한 만석 부자가 아닌 재물 만석, 인물 만석, 문물 만석을 합한 삼만 석의 부자였다고 전한다. 독특한 생활철학의 실천으로 12대를 이어 400년 동안이나 만석의 부를 유지하였고, 9대 진사를 배출해 낸 청백리 집안이라 인물이 많았고, 400년 동안 간직한 문화재급 보물이 넘쳐흘렀으니 삼 만석의 부자라 불리었다. 먼저 이들이 기거한 양택지의 풍수 입지를 보면 내남면 이조리와 교동 두 곳 모두 행주형국이라는 공통점과 더불어 물줄기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역수국(逆水局)에 위치하여 부를 이룰만한 터전이었다. 또한 자연 지리(지형학)적으로도 수(水)량이 풍부한 범람원 지역이라 유기질이 풍부하여 토질이 비옥하기 때문에 부를 이루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리고 이조리는 돌형의 형국이고 교동은 와형의 형국이라 혈의 사상이 뚜렷하였으며 고택은 그 중심에 위치하여 부를 축적하고 유지해 나가는데 손색이 없는 장소다. 교동 고택은 배산이 허한 단점이 있으나 나무를 심어 비보 하였고 집 앞 정면으로 보이는 도당산의 안대는 창고사로 이 또한 부를 이루기에 아주 좋은 형상이다.
여기에다가 고택의 가상(家相)은 두 곳 모두 동사택으로 안방과 대문이 서로 상생해주니 생기택이 되어 동사택에선 최고의 길택으로 지어졌다. 음택지(묘소) 또한 여러 가지로 나누어 분석해 보았으나 대부분이 양호하였다. 먼저 혈장뒤편의 현무봉은 대상지 11곳 모두가 후손들에게 부와 귀를 가져다주는 토성체와 금형산 이었고 좌청룡과 우백호도 대부분 상격이였으며 안산은 반길 반흉이였다. 그리고 나경으로 내룡의 방향을 측정한 결과 대상지 11곳 중 8곳이 지기가 충만한 배합룡이었고, 묘소의 위치는 11곳 모두가 능선에 위치하여 많은 생기를 탈수 있는 장소다. 또한 혈장 앞 수구의 관쇄도 대부분 상격이었으며 특히 혈장 밑에 9곳이나 저수지(선저수)가 있어 생기보전에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수구에 따른 88향법 역시 11곳 중 9곳이나 길향으로 놓여 져 큰 발복을 예약해주고 있다.
풍수에서는 부의 발복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요인들이 몇 가지 있다. 혈장주변의 산봉우리의 모양을 보고 금성형이나 토성체가 있으면 부봉으로 해석하고, 사신사 중 백호 자락이 양호한 경우도 부의 발복과 연관 지으며 혈장에서 보아 내국의 수세가 풍수적 조건에 합당하면 부의 발복이 크다고 해석한다. 최부자는 음·양택을 막론하고 풍수적 입지 조건들이 대부분 양호하였지만 특히 부와 관련된 부분에 비중을 두고 음·양택지를 선정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관찰되었다. 이들이 부를 이루고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철학과 더불어 일찍부터 풍수를 이해하고 일상생활에도 풍수를 생활화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